새벽예배 2023.08.11 | 사도행전 20장 25-38절 | 구진모 목사
사도행전 20장 25-38절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새벽 묵상
오늘 본문 35절 끝 부분을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복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을 기뻐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번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은 “그저 받는 것이 복이 있고, 남보다 더 가지는 것이 복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렇지 않아요. 특별히 오늘 35절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예수님 말씀을 인용한 유일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 생전 예수님 하신 말씀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 절,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한 마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 합니다. 홈리스에게 동전 몇 푼 도와 주면 “God Bless You!”라고 축복하는 것을 보면, 미국 사람들도 참 복을 좋아합니다. 한국사람들도 복을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집안 곳곳에 복자를 써 놓습니다. 그릇에도, 수저에도, 베게에도, 복자를 써 놓고 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복을 받는 것만 복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빼앗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전쟁에서 빼앗고, 사업을 해서 빼앗고, 남 망하게 하고 내가 잘 사는 것, 이것도 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서 즐기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서 즐기는 이런 악랄한 행복관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겁니다. 오늘도 빼앗는 것을 즐기는 그런 그릇되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불행이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주는 행복이 있습니다.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입니다. 기근과 재난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재의연금 같은 것을 모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감동적인 사람들의 기사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은 어렵게 살고 있지만, 그동안 모은 적지 않은 돈을 내 놓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접수 하는 분들이 그래도 이름이라도 적어 달라고 해도, “좋은 일에 쓰시면 됩니다”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나셨다는 이야기들은, 어떻게든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세상에서, 참 감동을 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일에 쓰시면 됩니다” 이 말 한마디 하고 조용히 돌아서는 그런 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행복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까?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그저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베풀고 주는 것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고 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겁니다.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는 것을 빼앗긴다는 생각을 가진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줄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꼭 빼앗긴다는 마음으로 주는 겁니다.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는 것, 이런 사람은 평생 빼앗긴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어떤 아내는 평생 자신이 이 가정에서 종처럼 이용당하며 산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그 분의 인생이 비참한 인생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가족을 위한 자신의 헌신과 베품에 기뻐할 줄 모르고, 늘 빼앗긴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기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행복은 더불어 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기주의자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나만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옆에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내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편안할 수는 없는 겁니다. 사람은 반드시 더불어 행복할 때 행복한 겁니다.
여러분, “받는 자와 주는 자” 어느 쪽이 되고 싶습니까? 어느 쪽이 돼야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주고받고 사는데, 이왕이면 줄 수 있는 편에 서십시오. 줄 수 있는 마음, 물질이 내게 있다는 것이 복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받는 자”의 마음에서 돌이켜서 “주는 자” 된 것을 기뻐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늘도 조금이라도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병원 심방을 갈 때마다, 병원에는 방문 받는 자와 방문하는 자가 있는데, 방문하는 자 편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이것이 복이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그 받는 자의 기쁨에 내가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함께 교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먹고 싶은 것도 자녀들에게 줍니다. 자녀들이 맛있게 먹으면, 어머님은 자신의 입에 들어간 것은 없어도 좋아하시는 겁니다. 이 것이 사랑의 기본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이웃의 기쁨에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교감하는 것, 그것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김대주씨라 하는 사람이 '사랑과 인생, 아포리즘 999'라고 하는 이상한 이름의 책을 썼어요. 그 책 중에 '사랑의 십계명'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할 때는 첫째, 계산하지 말 것. 둘째, 후회하지 말 것. 셋째, 되돌려 받으려 하지 말 것. 넷째, 조건을 달지 말 것. 다섯째, 다짐하지 말 것. 여섯째, 기대하지 말 것. 일곱 번째, 의심하지 말 것. 여덟 번째, 비교하지 말 것. 아홉 번째, 확인하지 말 것―내가 사랑한 것이 어떻게 됐나 그거 확인하려고 들지 말 것. 열 번째는 상황에 온전히 맡길 것.' 하나님께 깨끗이 맡겨 버리라는 겁니다. 그걸 놓고 어떻게 됐나, 뭐 결과가 어떻게 됐나,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까 사랑이 피곤해 진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또 “하늘에 쌓아 두라. 냉수 한 그릇을 네 이름으로 줄 때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섬기는 것, 봉사하는 것, 이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체질이 되어야 하고, 성품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아무튼 주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어느 주유소에 개스를 넣어 주는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좋은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개스를 넣어주면서 청년이 좋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주인에게 부러운듯이 “아저씨 이 차 참 좋으네요. 이 차 비싸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동차 주인이 하는 말이 “그럼, 비싼 자동차지. 그런데 나도 형님이 사준거야” 말하면서, 그 청년이 너무 부럽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차 주인이 “너도 이런 차 가지고 싶으냐? 이런차 타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그 청년 대답이 “아네요. 나도 내 동생에게 이런 차를 사 줄 수 있는 형이 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내 동생은 장애자라 잘 걷지를 못하거든요”
그렇습니다. 동생에게 이런 자동차를 사주는 형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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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얼마까지 받으려고 하십니까? 얼마를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할 때 어떤 목사님은 식사 기도를 얼마나 길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 이렇게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겠습니다” 그리고 아멘 하면 되는데, 이 음식 먹고 건강하여, 무엇 해 주시고, 무엇도 해 주시고, … 그 만큼 주셨으면 됐는데, 자꾸 뭘 달라고 합니다. 좋은 것, 맛있는 것 주셨는데, 또 달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제발 주유소의 청년처럼 “내 동생에게 자동차 하나 사주는 형이 되고 싶습니다. 남에게 베풀고 주는 사람되게 해주세요. 줄 수 있게 해주세요. 좀 더 후하게 줄 수 있게 해주세요” 이제는 이런 정도의 높은 수준에 도달 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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