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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3.06.06 | 예레미아애가 1장 18-22절 | 구진모 목사




예레미아애가 1장 18-22절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새벽 묵상


어제 묵상한 말씀 가운데 1:12절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성 안에는 아름다움과 부귀와 영광이 충만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화려하고 웅장 했던 예루살렘 성이 순식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성전을 비롯해서 온 성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에 거하던 유다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혔고 왕자들과 신하들은 현장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청년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렇게해서 바벨론 제국에 70년간의 포로 노예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유다가 이렇게 멸망하게 된 것은 유다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다 백성을 멸망케 한 원인은 예레미야애가 3:38-40절에 보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예레미야가 경고했는데도 그 간절한 외침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폐허로 변해버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이방인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곁을 지나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바라본 모양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에게  사람들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라고 묻는 겁니다. 



과연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때에 지나가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과 예루살렘의 멸망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걸까요? 



유다의 멸망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관계인가하면, 죄악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다는 사실에 있어서 관계가 있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으로 치우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저들이 거역했기 때문에 진노를 쏟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값은 사망이고,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중간중간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18절에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지금 처지에서 나오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잡혀가고 일부 남은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지 못해 쩔쩔 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차라리 “여호와는 너무하시다”라고 하기 쉬웠을 겁니다. 아니면 “여호와는 잔인하시다”라고 하기 쉬웠을 겁니다. 또는 “여호와는 무력하시도다”라고 하기 쉬웠을 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 고백은 “여호와는 의로우시지만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는다” 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은 과연 의로우신 분인가?” 하는 질문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면 이 세상에 모순된 일이 이렇게 많을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왜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선한 사람들이 고생하는 일을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문이 들 때에 우리는 먼저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그 문제의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립니다.



군대에서 군인들이 정열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자리를 잡고 “기준”하고 외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횡대로, 혹은 종대로 줄이 질서정연하게 이뤄집니다.



신앙생활에도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것이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 되어야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이치들이 질서정연하게 제 자리를 잡는 겁니다. 



“나는 의로운데”하면서 나를 기준으로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시 18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1:7절 중간부터 보면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대로 했습니다. 오히려 명령을 거역한 것을 왕이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시무하던 교회에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신 분 가운데 김교신이란 분이 있는데, 그 분의 따님이 교인이었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책을 주셔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 있는데, 김교신이란 분이 양정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시험을 치는데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커닝을 하는데도 선생님이 가만히 계시더랍니다. 그래서 학생들 생각에 선생님이 모르시나보다 생각을 하고 더 많은 학생들이 커닝을 하더랍니다. 그러다가 눈을 들어 선생님을 보니 선생님이 커닝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목이메인 소리로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쳐서…” 하고는 흐느껴 우시더라는 겁니다. 학생들을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뒤로는 커닝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부끄러운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나?”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뉴스에 보도가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 오신 여러분,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 한 마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안 풀리던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할 겁니다. 



또 본문 20절을 보니까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예레미야 자신의 마음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애가 타고, 마음이 상하고,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아픔도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위한 진통, 필요합니다. 주사를 맞을 때 아프지만 그래야 병이 낫습니다. 자녀가 주사 맞을 때 “애야, 하나도 안 아프단다”해서 맞게 하는 부모도 있고, “애야,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병이 낫는단다” 하는 부모도 있는데 “애야,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병이낫는단다” 하시기 바랍니다. “애야, 하나도 안 아프단다”해서 안심하고 팔을 내밀었는데 따


끔 아프면 아이는 부모를 불신하게 됩니다.



청소년들이 쑥쑥 자랄 때 근육 마디가 쑤시고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성장통이라고 부릅니다. . 어떤 조직이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성장할 때 아픔을 겪는 일이 많습


니다. 이런 아픔들은 필요한 아픔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은 아픔, 그 아픔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경건해지기 위한 아픔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픔은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더 간절해지게 만듭니다.



고생하지 않고 자란 사람이 큰일하기 어려운 것 같이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신앙적으로 큰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했을 때 주변 부족들은 그것을 기뻐하고 조롱했습니다. 모압, 암몬, 블레셋, 이런 이방 족속들입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우리는 탄식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위로해 주어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20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참 따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험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누가복음23:34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탄식 소리 듣고, 또 재난을 보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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