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9.23 | 창세기 27장 1-14절 | 구진모 목사
창세기 27장 1-14절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새벽 묵상
우리는 이삭의 가정에서 형제가 서로 장자 명분과 축복을 위해서 약점을 이용하고 속이고 싸우고 하여 결국 형제가 원수가 되는 불행한 모습을 봅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한 가정의 이야기라 좋게 넘겨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객관적으로 그 원인을 살펴보면, 부모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이삭은 영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일들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깨닫게 해 줘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의 지나친 야망을 견제해 줘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가 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서로 자녀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원수가 되는 가족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카톨릭 수녀원과 마주한 곳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개신교 목사가 그리로 들어가는 것을 수녀들이 바라보고는 “저런!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 뒤로는 저모양이군!” 하면서 격분했습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유대교 랍비가 그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녀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니 할수 없다”고 빈정 대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카톨릭의 신부가 그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수녀들이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신부님이야 전도하러 갔거나 누가 죽어서 장례를 치루기 위해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우리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볼 때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기도하고, 선한 사람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겁니다.
바로 이삭의 가정이 바로 이런 편견과 편애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 편견을 갖지 말고 진실한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 25:28에 보면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는 이삭이 에서에게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별미를 먹고 “내가 죽기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자주 쓰는 용어가 있는데, “별미 축복”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이 별미축복을 해 주겠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가 이삭이 잘못된 겁니다.
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게 되었습니까? 여기 아버지 이삭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유는 아버지 이삭이 아들을 사랑하는 조건으로 항상 자기 입맛을 돋구는 별미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이삭 때문에 에서가 육적인 사람, 물질적인 사람이 안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별미 때문에 축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랬습니다. 믿음 외에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였더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문제는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의 눈이 어두워진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겁니다.
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가르쳐 주어야할 아버지가 아들이 잡아서 요리해 오는 별미를 좋아해서 그 아들을 편애했으니 에서가 그런 성향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늘 부모가 된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들의 일거수 일투족 그리고 표정이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 그리고 그들의 장래를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그러면 리브가는 왜 둘째 아들 야곱과 짜고서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에서의 축복을 야곱에게로 돌리려고 했겠는가?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삭을 속였다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신앙적인 차원의 문제인 겁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을 때 두 아이가 태안에서 싸우는 겁니다. 이때 리브가가 하나님께 “이럴 경우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창세기 25:23절 끝부분에 분명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에게 본문 12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고 걱정을 말합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본문 13절에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비장한 결의가 아닐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mmentai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