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낫바네아

새벽예배 2022.10.31 | 창세기 41장 45-57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41장 45-57절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53.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새벽 묵상


얼마 전에 딸을 대학교 데려다 주면서 딸이 자기 이름을 학교에 쓰는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자기 이름 “유빈”이라고 쓸 줄 알았는데 웬걸 갑자기 “레이첼”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제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유빈아 왜 이름이 레이첼이니? 아빠 그냥 미국이름이 좋아서.. 유빈아 레이첼은 원래 라헬이고 그 이름 뜻이 암양 이란 뜻이야. 그것보다는 한국 이름 유빈이란 이름이 훨씬 좋은 거 같은데. 유빈은 기쁠 “유”자에 빛날 “빈”자를 써서 기쁨으로 세상에서 빛이 나는 딸이 되라. 얼마나 멋지냐? 아빠 정말 그런 뜻이야?

여러분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원래 태어난 나라에서 지은 이름, 그 좋은 이름의 뜻을 왜 살리지 않습니까? 이 좋은 이름 누가 지었을까요? 제가 지었습니다. 멋진 아빠 아닙니까?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하하

여러분 다니엘서 6장에 사자굴 속에 들어간 다니엘이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나온 이야기만큼 신기한 이야기가 그 앞에 다니엘서 3장에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죠? 예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고 털끝하나 상하지 않고 다 살아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원래 이름이 아닙니다. 원래 히브리식 이름은 정확하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입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해서 “하나냐”, 하나님 같은 분이 어디 있는가? 해서 “미사엘”,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해서 “아사랴” 이 얼마나 좋은 이름들입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아니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학자들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기록할 때에 현장의 그대로를 기록하기 위해서 즉 바벨론에서 그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으나 살아나온 그 때의 그 생생한 바벨론의 이야기들을 바벨론 사람들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 전했을까요? 분명히 원래 고유의 이름으로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하나님께서 그 이름대로 큰 역사를 이루시고 은혜를 베푸시사 도우셔서 그 말도 안 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셨다는 이야기들을 보는 사람들마다 전하고 또 전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어도 변함없이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들 이름의 뜻과 함께 자랑스럽게 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나의 나라 내 언어의 뜻을 살려 당당히 밝히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다른 나라에 와서 이름이 바뀌고 그냥 바뀐 이름이 좋아서 그대로 눌러앉아 산 사람, 더 좋은 자기 나라의 이름을 붙들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원래 요셉은 조셉, “그는 더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은 더하실 것이다 라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이름을 붙들고 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바로왕이 지어준 이름 “사브낫바네아” 즉 “비밀을 열어 보이는 자”라는 뜻의 사브낫바네아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오늘 본문이 46절부터인데 어제 마지막절인 45절부터 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요셉은 왜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었을까요?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바로왕에게 벌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은 요셉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살았다고 추정합니다. 좀 더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장인어른과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45절 보십쇼. 바로왕이 꿈을 해석해 주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위해 어느 집안과 혼인을 맺게 합니까?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장인어른 보디베라는 “온” 즉 태양 숭배의 중심지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는 국사를 관리하는 큰 관리였습니다. “아스낫”은 이름이 여신 “네이드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할 말이 없죠. 아버지는 태양신 섬기는 제사장, 딸은 여신에게 속한 사람. 요셉은 분명 어릴 때부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야곱에게서 듣고 또 들었을 것입니다. 고조 할아버지 아브라함 , 증조 할아버지 이삭,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까지 그 수많은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셨는지 그렇게 들었던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 순간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내가 어떻게 아무리 애굽의 총리라도 그렇지 내 고향 땅의 아내가 아니라 애굽의 아내를 얻고 살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그 아들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좀 더 확실한 결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51절 보십쇼. 아스낫과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고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므낫세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여러분 잘 읽어보십쇼. 요셉의 아픔이 아들이 이름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 동안 고생했던 것 이제 다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 과거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뜻입니다. 52절 보십쇼.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지금 수고한 땅이 어디입니까? 애굽 땅입니다. 이 애굽 땅에서 번성하고 부자가 되게 하셨더라. 그 뜻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보니 어떻습니까? 요셉은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풍족하게 되었고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가나안 땅으로 갈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주리라 약속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고 여기서 쭉 살겠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까지만 불려지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번성하게 되었지만 모든 것을 갖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축복권까지 이어질 수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권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로 이어져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가 얻을 첫 번째 교훈은 1. 요셉이 애굽의 둘째 치리자 최고의 자리, 번성의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축복권을 따라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바로왕의 명을 정중히 거절하고 “왕이여 제가 애굽이 안정될 때까지 풍년 7년 흉년 7년까지 잘 제 사명을 감당하고 다시 제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했다면” 신앙의 계보는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아닌 요셉의 족보에서 나셨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 왕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권력, 최고의 지혜, 최고의 부를 누렸던 왕은 분명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시험 때만 되면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혹시 부와 권력도 누리게 해 달라는 마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솔로몬은 마지막 부분에 이방 아내를 많이 얻으면서 산당을 지어주고 아내들에게 많은 것을 허용하면서 결국 용두사미의 왕이 되고 맙니다. 끝이 영 씁쓰름한 왕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와 권력과 번성함도 좋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는 하나님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는 굳건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2.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47절 보십쇼.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53절 보십쇼.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절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이 7년 풍년, 7년 흉년 이야기는 바로의 꿈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일곱 살진 암소가 파리한 일곱 암소를 먹었던 꿈, 일곱 무성하고 충성한 이삭이 일곱 마른 이삭을 삼키는 꿈, 바로의 꿈 그대로 풍년 7년 흉년 7년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 요셉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꿈꾸게 하시고 그대로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이전에 하나님이 꾸게 하신 술 관원장의 꿈도 그대로 이루어져서 삼일 안에 그의 직권이 복직되었고 떡 굽는 관원장의 꿈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그대로 이루시는 역사였습니다.

또 있습니다. 요셉이 처음 꾼 두 가지 꿈 기억하십니까? 볏단 11개가 요셉의 볏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이 꿈도 42장 43장 넘어가면서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보게 됩니다.

여러분 수천 년 전부터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대로 그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그대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여러분 지금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흉년 7년을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풍년 7년 흉년 7년의 예언과 성취를 그냥 말씀하시고 성취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 애굽에 내린 흉년 7년에서 주시는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흉년 7년이 있고 후에 풍년 7년이 와서 그냥 모두 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풍년 7년 뒤에 흉년 7년이 있어서 마지막 다가올 엄중한 심판을 준비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땅 우리 모두를 지으실 때에 아름답게 보시기에 좋게 지으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에 그들을 내어 쫓으셨던 하나님, 소돔 고모라가 죄악이 관영할 때에 불로 멸하시는 하나님, 노아의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너무 많으므로 노아가족 8명과 가축 동물 중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다 물로 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마지막 심판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풍년 7년이 있을 동안에 후에 일어날 일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오늘 밤에라도 언제라도 그 때가 올 때에 이렇게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주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을 준비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듣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