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5.02 |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 이선기 목사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절.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절.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절.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새벽 묵상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려 버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왜 싸우고 난리야?”
여러분 참 가슴 아픈 이야기 아닙니까?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인식되지만 교회에서의 작은 다툼은 세상에서 큰 다툼으로 인식된다는 사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교회는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다른 교회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그리고 그 교회의 구성원이 저와 여러분이 변하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 사이에 화평의 씨앗이 뿌려지고 화해와 관용의 꽃씨가 퍼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하고 소리쳤던 이들이 이게 교회구나! 이런 교회도 있다니 감탄하고 내가 속한 온전한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고린도 하면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이 생각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13장까지 가기 전에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1장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큰 분쟁을 겪고 있는 교회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절 보십쇼. 바울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여기서 “분쟁”이란 단어는 생명의 삶 5월 34쪽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스키스마”라고 발음하며 옷이 찢어지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한 옷이 되어 추위에도 더위에도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는 한 옷이 여기 저기 찢어지는 것 같은 분쟁, 그런 분쟁의 모습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실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연 이렇게 분쟁 중에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그 메시지에서 교훈을 얻으시면서 저와 여러분이 지금 속해 있는 교회에 이 운동을 일으키시는 참 교회의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 첫 번째로 바울은 교회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한다고 교훈했습니다. 10절 다시 보십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러분 교회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이고 히브리어로는 카할인데 불러 모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권면하고 초청해서 불러 모으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열심히 불러 모으시길 바랍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맛있는 것 사줘서라도 불러 모으시고, 예의 있게 초청하시고, 힘써서 초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냥 불러 모으기만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어제 본문 1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즉 교회는 그 첫 번째 특징이 하나님이 주인이신 곳이고 두 번째 특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는 곳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고 하나님만이 주인 되어져야 참 교회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 되면 교회가 거룩하여지고 즉 하나님을 닮아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즉 거룩해지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사람들을 열심히 불러 모아서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거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곳 그 곳이 진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이런 주인공과 목표를 뒷전으로 하고 다른 것들이 주인공이 되었고 다른 목표가 교회의 목표가 되고 말았기에 지금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황당하게도 “말” 때문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모두가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라고 그 권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면 하나님에 대한 말로 풍성한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데 분명히 하나님과 상관없는 다른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겼구나 예상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말이 아닌 다른 말이 들려지니까 마음도 달라지고 뜻도 서로 어긋나고 분쟁에 휩싸이게 된 고린도교회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인 인간들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이 아닌 하나님 없는 엉뚱한 말 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십쇼.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십니다. 이 흩어버리신 인간의 언어가 어디서 다시 같은 말이 됩니까? 사도행전 2장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같은 말로 변합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 보면 각 지역에서 온 이들이 이렇게 이 광경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 즉 하나님에 대한 말로 풍성한 곳이 될 때에 같은 말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이루는 참 교회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본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마다 예배와 속회와 모든 모임마다 하나님에 대한 말로, 사람의 말을 점점 줄이시고 하나님에 대한 말로 가득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건강한 교회를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속회 모임에서 인도자님이 정말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도자님은 자꾸만 사람의 말,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이야기하려는 이들을 잘 제어하고 잘 다독거리셔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말로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교회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이 주로 하나님에 대한 말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먹는 이야기, 돈, 외모, 다른 사람 험담, 비난 이런 것들 말고 그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두 번째로 고린도교회는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가? 에 집중하다가 분쟁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가 아니라 왜 세례를 베풀었는가? 에 집중해야 합니다. 12절 보십쇼.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근본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여러분 이 표현들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따라서 나누어진 이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책망하면서 바울은 14절에 너희들이 누가 세례를 베풀었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파가 나누어진 것을 알기에 나는 겨우 두 세 사람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16절에 스데바나 집 사람 외에는 세례주지 않았다 단언합니다. 15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즉 누구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사람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바로 나도, 아볼로나 게바나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아니라 왜 세례를 베풀었느냐? 즉 구원받은 감격이 있기에 이제는 옛 사람은 죽고 거듭나게 되었기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셨기에 세례 받는 것이다. 권면하고 있는 바울, 뭣이 중한디? 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 이름 때문에 사람 때문에 이 파 저 파로 나뉘어지느냐?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인생 부활의 소망을 가진 이들이 아니냐?
모세는 금송아지 섬기며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서며 외칩니다. 하나님 내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우시고 이 백성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이름 없애기 운동이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주인 되지 않는 교회 만들기 운동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내 이름 드러내지 않게 일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참 눈살 찌푸리게 하는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갔더니 아무개 기념 무슨 예배당, 사람 이름이 왜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는지 이게 지금 누구를 위한 교회인지, 예배 순서지 보면 임직예배 순서지에 무슨 회장님이 그렇게 많은지 아무개 무슨 증경회장, 아무개 무슨 총회장, 노회장, 하나님보다 더 드러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게 고린도교회 순서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이런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이 주인 되지 않는 교회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되도록, 하나님만이 주인되시는 예배 되도록 영적인 싸움 잘 싸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분쟁이 있는 고린도교회가 하나 되는 방법은 딱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7절 보십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분쟁으로 분열된 고린도교회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하나 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분열된 우리 인간 사이를 온전히 합하게 하시는 하나 되게 하시는 십자가인데 너희 고린도교회는 반대로 나누어졌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이다.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되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지고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 그 은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본질에 집중하십시오. 사람이 주인 되지 않는 교회, 사람이 주인 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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