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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준을 버리고!

새벽예배 2023.08.21 | 사도행전 24장 24절 - 25장 12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24장 24절 - 25장 12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새벽 묵상


“거룩하신 주여, 이 놈이 죄인입니다. 이 놈이 입만 살아 있는 한국 교회,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주여 이것이 감히 설교할 자격이 없는데, 주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비천한 것을 몰아붙이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겉모양은 요란하지만 죄악이 가득한 이 한국 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되 통애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옵소서. 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시고, 주의 거룩한 영광이 이 땅 가득하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누구의 기도인지 아십니까? 16년 전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집회에서 대표로 기도하신 옥한흠 목사님의 기도입니다.

CBS 한 기자가 고 옥한흠 목사님에 대한 특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는 무엇보다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설교는 축복과 평안처럼 성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이 아닌, 들어야만 하는 날선 메시지였습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목회자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한국 교회 선배 목사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진리를 외치는 목사님들의 메시지에 아멘하고 끝이 되면 안 됩니다. 아멘했으면 정말 그 메시지대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속화 되지 않도록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세속화 되고 사람이 기준이 되면 결국 기독교는 그저 사람이 만든 종교들 중에 하나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 이들은 철저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으로 사는 삶을 뭐라고 하는가? 코람 데오 라고 합니다. 코람은 “어디어디 앞에서” 데오는 “테오스” 하나님, 중세에 너무나 세속화된 기독교 개혁하고자 일어섰던 이들의 모토가 바로 코람데오였습니다. 루터가 일어섰습니다. 칼빈이 일어섰습니다. 쯔빙글리가 일어섰습니다.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진리를 외침으로 교회가 참 교회가 되도록 기독교를 깨웠던 이들의 발자취를 떠올리시면서 사람이 주인 되지 않는 기독교, 하나님만이 주인이신 교회를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바로 이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 기준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기준으로 살아라. 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 나오는 수많은 왕들 중에 몇몇 왕들만 빼고 대부분 악한 왕들에 대해, 대부분 앞에 쓰여진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칭찬받았다, 사람들이 싫어했다가 아니라 철저히 여호와 보시기에 어떻게 행하였는가? 그게 성경의 기준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기준도 다시 분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 좋게 하는 인생을 사셨다면 지금부터 바뀌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지금부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을 붙잡은 이들이나 심문하고 조사하는 지도자 벨릭스나 베스도의 모습은 사람 기준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기준으로 살아야 했던 대제사장과 유대인 고위층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철저히 사람 기준이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실망스럽지만 살펴보시면서 교훈을 얻으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1. 우선 우리는 총독 벨릭스, 철저히 소유에 집착하는 자요, 사람 기준으로 사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인 돈에 집착하는 자였던 벨릭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벨릭스는 그 이름의 뜻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탐욕으로 행복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24절 보십쇼.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여기서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를 언급한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벨릭스와 결혼한 세 번째 아내가 바로 이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로 원래는 에메사의 왕 아지저스의 아내였는데 마법사를 돈 주고 부려 강제로 빼앗아 왔습니다. 원래 벨릭스가 로마 총독이 된 것은 형 Pallas 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원래 노예였는데, 로마 정부가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게 되고, 해방된 노예 출신들을 관직에 등용할 때에 그의 형 Pallas가 등용되어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신임을 받던 형의 영향력으로 인해 그는 A.D 52-59년 동안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 된 것입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역대 총독들 중 가장 악독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는 노예의 마음을 갖고 왕의 권세를 행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돈과 줄과 빽으로 올라온 그의 삶의 기준은 철저히 돈 뿐이었음을 25절과 26절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25절 뒤에 바울이 벨릭스의 부름을 받아 강론했더니 하는 말이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이건 진짜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듣겠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 다음 26절 보십시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안타깝지만 그 뜨거운 사도 바울에게서 직접 개인 교수로 복음의 본질을 듣는 영광의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벨릭스가 자주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2년 동안이나 바울을 구금해 놓으면서 특별한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풀어주지 않고 그저 뇌물을 원했던 벨릭스. 영원한 생명의 길이 바로 코앞에서 전해지고 있는데도 그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썩은 동아줄 붙잡고 영원한 생명의 줄을 놓쳐버린 벨릭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도 아말렉왕과 좋은 소와 양을 살려가지고 와서 했던 변명이 뭐였습니까? 다 진멸하였나이다. 다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제물로 쓸 양과 소를 남겨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뭐라고 질책합니까? 왕이여 제사보다 순종이 났습니다. 숫양의 기름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사울왕은 두 번째 기회도 놓치고 하나님께서 버리는 왕이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우리 주위에 이런 벨릭스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최고다 하는 사람들, 더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르고 사는 이들, 아니 교회 가면 돈이 생기냐? 왜 바보같이 교회 가서 돈 뺏기고 오냐고 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복음 12장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사람 기준, 돈 기준으로 사는 삶을 뛰어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7절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벨릭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 되어 있지 않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탐욕과 폭정을 일삼던 벨릭스는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가 황제에게 전달되어 총독에서 물러나 로마로 소환 당했다가 또 형의 도움으로 폼페이로 유배당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폼페이에서 화산이 터져 AD 79년 8월 24일에 벨릭스 일가족 모두 화산에 덮여 몰살당하고 맙니다. 이게 돈 기준으로 살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린 벨릭스의 인생입니다. 얼마나 허망합니까?

2. 두 번째로 사람 자체가 기준이었던 베스도 총독에게서 또 다른 사람 기준의 삶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 벨릭스와는 다르게 12대 베스도 총독은 처음부터 굉장히 예의 있게 유대인들을 배려합니다. 25장 1절 보십시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부임하자마자 숨도 돌릴 틈 없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성실한 모습입니까? 역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그는 온순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고 팔레스타인의 소요를 진압하는 등 짧은 3년 동안에 많은 공적을 남겼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 실제로 이 바울 사건을 앞에 두고서는 너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절에 인사 온 베스도 총독을 두고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처음 본 베스도 총독에게 다짜고짜 바울을 고소하며 3절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길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바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베스도는 아니다. 4절 내가 곧 가이사랴로 가야 하니까 5절 유력한 자들이 나와 함께 가서 고발하라 권하게 됩니다. 비교적 냉정하게 판단하고 정확하게 재판하려는 베스도의 인품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6절 이제 가이사랴에 온 베스도가 정식으로 바울을 심문하게 되는데 9절 보십쇼.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아니 이게 뭡니까? 아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흔들리는 베스도 총독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줏대가 있고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베스도 총독의 모든 관심은 철저히 인간관계에 있었기에 금방 또 정책을 바꾸는 베스도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어정쩡한 베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바울은 여기서 다시 로마인의 관습과 전통을 사용합니다. 11절 끝에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즉 로마인만이 가진 특권 가이사 황제께 상소하여 베스도 총독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여하튼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베스도 총독, 내일 본문인 13절 이후에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가지고 죄 없는 바울을 2년이나 감금하고 또 결정하지 못하는 이 애매한 문제를 가지고 문안하러 온 아그립바왕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죠.

사람 기준으로 사람들의 마음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정확한 기준 없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지도자는 결국 믿을 수 없는 부끄럽고 무능한 지도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교회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모든 걸 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가장 좋지만 완벽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욕심 모든 인간적인 이기심을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꼭 다수결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철저히 사람이 주인 되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서로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몸부림쳐야 합니다. 사람이 기준 되지 않도록 베스도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기준을 하나님께 두시길 바랍니다.

벨릭스는 돈 때문에 흔들리고 베스도는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그저 자기들의 이권 때문에 바울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어지러운 세태 가운데 3.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길을 선택하는 바울의 모습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11절 보십쇼.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참 당당하고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당당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딱 하나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그의 삶에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인간의 한계인 죽음까지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임을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왜 두려워하십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죽어도 영광이 되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신 영광의 주님이 우릴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 때문에 사람 믿다가 상처 받고 돈 때문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지 마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부활의 주님 붙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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