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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타올라 정곡을 찌르십시오

새벽예배 2023.08.23 | 사도행전 26장 1-12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26장 1-12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새벽 묵상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앞부분에 아주 인상적인 서평이 나오는데 여러분께 읽어드립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는 제목을 보고 저자를 알기에 “설교를 어떻게 잘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설교자는 어떻게 타올라야 하는지”를 말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이 다소 빗나갔다. 설교자가 어떻게 타올라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왜 불꽃처럼 타오를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설교자의 선배라 할 수 있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소명기사들을 통해서 그들이 그처럼 불꽃같은 삶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 그 분과 그리고 그 분과의 만남, 그 분의 부르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철저히 선지자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께 모든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선지자의 후예인 현대의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이기에 설교자들은 자신의 “어떠함”을 훈련하고 성숙시키기보다 하나님께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출 것을 권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정말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맞나? 그저 교회가 정해 놓은 제도의 과정을 통과한 강단꾼은 아닌가? 깊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고민이 깊은 기도로 이어지고, 불꽃같은 삶으로, 그리고 불꽃과 같은 설교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서평을 쓴 사람은 설교를 이렇게 하면 불꽃같이 뜨겁게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인 줄 알고 읽게 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보니 하나님과의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설교자는 자동적으로 불꽃처럼 타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주 설교하는 목회자의 설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뜨겁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뛴다고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뜨겁게 해야 한다고 크게 소리 지르고 온 몸을 흔들며 기도해야만 꼭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뜨겁게 해야 한다고 눈 딱 감고 빨리 내야 뜨겁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뜨겁게 만나기만 하면 다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말라 그래도 기도하다가 뜨거워지고 헌금 잘 해야지가 아니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기고, 교회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받은 용서, 받은 은혜와 사랑 때문에 뜨거워져서 그냥 있을 수 없는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 한 분도 빠짐없이 무엇을 해야 해서 신앙생활 하는 모습은 다 벗어버리시고 하나님을 다시 뜨겁게 만나심으로 견딜 수 없는 불꽃같은 열정의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또 활활 타오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 심문받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기억하고 뜨거워져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복음의 불길이 일어났던 전도자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총독 밸릭스 앞에서, 그리고 베스도 앞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 어제 말씀드린 근친상간 부부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앞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의 불길에 싸여 주체할 수 없는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 26장 1절 앞에 소제목으로 “바울이 변명하다” 라고 쓰고 있는데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가 변명입니까? 변명이라고 하기 보다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설교자, 강력한 복음의 불덩어리 설교자로서의 외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울이 주체할 수 없이 불꽃처럼 강력한 설교를 전하는 와중에도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 집중하고 부활의 주님 전하는 것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언제부터인가 교회에 간증 집회가 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 느끼셨습니까? 많은 간증자들이 처음에는 반짝 대단하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증하다가 중심이 흔들린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전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주인공이신 주님 전하는데 소홀해지고 나도 모르게 간증하는 내가 중심에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참조하시면 다시 간증하시는 분들이 놓친 부분들이 보입니다. 잘 참조하시면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주인공을 놓치지 않는 부활의 예수님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하는 좋은 간증자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우선 바울은 이제 아그립바왕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아주 예의 있게 복음을 전하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전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1절 보십쇼.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여기서 손을 들어 라는 표현 “에크테이나스 텐 케이라”라는 헬라어는 지난 21장에 천부장의 배려로 층계에서 복음 전할 때 회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든 것과 다른 표현입니다. 학자들은 연설을 시작하면서 예의를 표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최고 권력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 앞에서 사슬에 묶인 채 정중히 인사하고 비장하게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의를 갖추는 것은 연설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거나 약장사처럼 무례하게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하며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간증자들이나 설교자들은 그 행동 때문에 청중의 마음을 닫히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2절에도 사도 바울의 예의 있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아그립바왕을 정중하게 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이 다행히 여긴다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 베스도는 유대인의 풍습과 문화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좀 답답했는데 당신 아그립바왕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의 사정을 잘 아시는 분이니 다행입니다. 하는 뜻과 또 하나는 이게 중요한데, 지금 이렇게 변명한 시간을 주시는 것은 그냥 변명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요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니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마음속에 얼마나 불꽃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사모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까? 저와 여러분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모하며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 분명하게 전하는 강하게 복음 전하는 증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아그립바왕은 바울이 2년 동안 잡혀 있었다는 데 도대체 왜 잡혀 있는지 궁금한데 한번 알아보자 하는 호기심이었고 시중의 고위층들은 이게 뭔가 하는 궁금증으로 모여 있는 상황, 한편 살기가 등등한 유대인들은 지금이 기회다 저 바울의 참람한 말을 들어보라 하고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고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바울은 그런 청중들의 여러 상황보다도 모든 관심이 복음 전하는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바울의 온통 관심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할 수 있다는 감격에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8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게 바로 정확한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해야 더 잘 전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어 복음 전하는 기회가 막힌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고 기회주심이었습니다. 고위층들, 심지어 왕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주시고자 감옥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빌립보서에서 점치는 여인 고쳐주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서 착고에 차였을 때 바울과 실라는 뭐했습니까? 밤새 기도하고 찬송할 뿐이었습니다. 매를 맞을 때도 다 뜻이 있겠지 뭐가 뜻인가? 고민했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려 죄수들이 도망가고 간수가 낙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에 간수를 붙잡아 살리며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었구나. 이래서 감옥에 들어와 갇히게 하셨구나. 간수와 그 가족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다 세례받게 되었을 때에 바울에게는 큰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저와 여러분이 지금 감옥에 갇힌 상황이어도 너무 낙심치 마시길 바랍니다.

자 이렇게 예의 있게 아그립바왕과 고위층들 앞에서 복음 전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왜 자신을 대제사장과 열심 있는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는지를 아그립바왕의 귀에 분명하게 전달 될 표현을 사용하며 전합니다. 4절 보십쇼.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내 과거 부활의 주님 만나기 이전에 내가 얼마나 유대인다운 유대인이었는지 지금 저들처럼 얼마나 열심인 유대주의자였는지 찾아보면 다 알려져 있는 바라는 표현입니다. 5절 보십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피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여기서 “우리 종교”라는 표현은 바울과 아그립바왕이 똑같이 유대인이었다는 표현의 강조입니다. 그 다음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게 중요한데, 나는 그냥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즉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가장 경건하고 아주 유대주의자 중의 정통유대주의자였습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아그립바왕은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6절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그토록 바라고 소망했습니까? 하고 가장 중요한 핵심, 신앙의 정곡을 찌를 준비를 합니다. 7절 후반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즉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과 다르게 바리새인들이 가진 부활의 소망, 뒤에 8절로 정곡을 향해 가다가 아주 찌르고 쐐기를 박는 바울의 가장 강한 한방을 터뜨립니다. 8절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즉 아그립바왕이여 당신도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 7절 열두 지파가 그토록 간절히 얻기를 바라는 부활 신앙을 알지 않습니까? 내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고 하니까 저렇게 흥분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못 하실 것이 없는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리고 정곡을 찌르며 도대체 무엇을 강하게 전하고 있는지 보이십니까? 자기의 로마 시민권도 아닙니다. 자기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가방끈 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끌려 다니며 심문받는 것에서 석방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딱 하나였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 제가 그 분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기다려 왔던 메시야 그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왕도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랍니다.

간증자들이 흔들림 없이 좋은 간증자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 되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히 주인공은 부활의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꼭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 잡고 간증하는 강사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 일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 바로 옆집에 사는 누구라도 내가 만난 부활의 주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정확하게 복음이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지면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이 많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전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증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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