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3.06 | 사무엘상 19장 18-24절 | 이선기 목사
사무엘상 19장 18-24절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새벽 묵상
북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한 심각한 학대를 피해 도망하고 있었던 프레드릭 놀란이란 분의 간증 중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프레드릭 놀란은 자신을 붙잡으려하는 사람들에게 언덕과 골짜기로 쫓기고 쫓기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친 나머지 붙잡힐 각오를 하고, 마음에 준비를 하며 한 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임박한 죽음을 생각하며, 그는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몇 분이 지났을까요? 그 조그마한 거미가 동굴 입구에다가 멋지게 아주 크고 넓게 거미줄을 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놀란을 잡으러 쫓아왔던 사람들이 도착해서 입구에 쳐 있는 거미줄을 보고서, 거미줄이 뜯겨짐이 없이 사람이 동굴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위험에서 구출함을 받고, 동굴에서 나와 프레드릭 놀란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가느다란 거미줄도 두터운 방벽이 되고,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두꺼운 방벽도 한낱 거미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면 심지어 작은 거미를 사용해서라도 두터운 방벽으로 우리를 안전히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다윗은 도망길에 있습니다. 요나단의 설득력 있는 변호가 있었지마는 금방 다시 질투의 화신이 발동되어 또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왕을 피해 다윗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본문 19장 8-17절에 보면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내려 탈출시키고 다윗이 병들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벌고 다윗을 무사히 내 보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다윗은 고민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안전한가? 어디로 도망해야 하는가? 하다가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가게 됩니다. 18절 보십쇼.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고향집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사무엘을 찾아갔다고 하는 것, 자신에게 왕이 될 것이라고 알려준 사무엘을 찾아갔다는 것은 1.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대단한 능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은 안전한 존재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킨다고 하는 사람 오늘 밤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그냥 작별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난 건강해, 넌 내가 반드시 지킨다 하고 장담해도 자기 생명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람 말고 눈에 보이는 곳 말고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 품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는 하나님 저와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라마라는 지명의 뜻은 히브리어로 높다 라는 뜻이고 ‘나욧’(Naioth)은 히브리어로 “들판”, “거주”, “기숙사”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들판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기숙사”의 의미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실망하여 자기가 태어난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높은 곳에 기숙사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는 영적 지도자 훈련을 하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다시 18절 맨 뒷부분 보십쇼.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다윗이 사무엘을 만나 그간 있었던 힘든 일들을 다 전하였고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사무엘이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분명히 사무엘의 제자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받아들이면 결국 반역죄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하는 표현은 분명히 소문으로 들어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라마 나욧은 가장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감히 대적할 적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하나님 품임을 경험하고 알았기에 다윗은 시편 18편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람 의지하지 마시고 우리를 보호하실 하나님, 심지어 죽음 이후에까지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실 참 보호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신기한 일 오늘 본문에서 사울이 보낸 세 차례나 보낸 전령들이 하나같이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19절에 보니까 어떤 스파이에 의해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것이 사울왕에게 전달됩니다. 사울왕은 서둘러 전령들을 보냅니다. 20절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렇게 기이한 일이 벌어지니 믿을 수 없던 사울왕은 다시 다른 전령들을 보냅니다. 두 번째도 또 전령들이 예언을 하니까 세 번째로 또 전령들을 보내었습니다. 21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했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와이트나버우 라고 해서 앞날을 예언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찬송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 강합니다. 지금 다윗 잡으라고 전령들을 보냈는데 전령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니까 말씀 전하는 자가 되고 특히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또 높이는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캔터키에 에즈베리 대학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대학생들이 2주이상 쉬지 않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뜨거워지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아십니까? youtube에 에즈베리 부흥이라고 검색하면 얼마나 뜨겁게 성령께서 에즈베리 신학교도 아니고 에즈베리 그냥 대학교를 뒤집어 놓으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뜨겁게 찬송하며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일하심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사울왕이 보낸 전령들이 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찬송하고 말씀으로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전하고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 다윗 잡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의 사람이 되어 찬양하고 또 찬양했던 사울의 전령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까지 전령들을 보내어 함흥차사가 된 것을 본 사울은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리라 하고 결단하고 일어납니다. 23절 보십쇼.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살기가 등등한 사울왕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니까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힘과 찬양하고 또 찬양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춤추어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성령 충만한 사울왕의 모습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는 사울왕이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라고 되어 있는데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벗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다윗이 겉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며 찬양한 것처럼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감당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찬송하고 뛰며 소리 지르며 놀라운 은혜와 눈물의 사람으로 성령의 술에 취해 있었다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맨 마지막 24절 맨 마지막 문장 보십시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얼마나 사울왕이 자신도 모르게 성령에 취해 뛰면서 찬양하고 말씀의 사람이 되었는지 사울이 선지자냐 하는 속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라마 나욧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는 역사 찬양과 기도 말씀으로 충만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3. 마지막으로 지금 이 곳 라마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보시면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첫 대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공경했으며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것이 있느냐 확인할 정도로 사울이 순수하고 진실했던 그 때 찾아왔던 그 곳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을 때 소녀들이 답한 그 우물 그 우물이 바로 라마의 우물이었습니다. 22절에 나오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 이 우물이 바로 그 우물이었습니다.
전에 왕이 되기 전에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했던 사울이 이제 왕이 되어서는 질투심에 살기가 등등하고 온갖 교만한 사울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는 것 너무나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사울왕이 이렇게 다시 라마의 우물로 와서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고 찬양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다시 은혜를 회복하고 계속해서 첫 모습, 왕 되기 전에 그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회복됨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이제 사무엘상 20장부터 성경은 다르게 쓰여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이후에 또 다시 살기가 등등한 사울왕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다면 이제는 되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향해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된 감격을 잃지 마시고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