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10.04 | 창세기 31장 1-16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31장 1-16절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새벽 묵상
옛날 가수 최희준씨의 –하숙생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참 허무하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인생을 처량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랑 비교되는 우리 옛날 복음성가가 있는데 순례자의 길 이란 찬양입니다. 우리 인생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2절까지 읽어드립니다.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 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같이 인생을 노래하는 노래이긴 한데 많이 다릅니다. 우리 인생이 비록 잠깐 왔다 가지만, 고생도 참 많이 하지만 꼭 붙들어야 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찾은 자로,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딱 한번 분인 인생,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겨우 100년을 살까 말까한 인생을 처량하게 살지 마시고 소망을 가진 자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소망을 가진 자로 살려면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페르샤의 한 왕이 어떤 노인에게 "그대의 나이가 몇 살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노인은 " 나의 왕이시여! 저의 나이 겨우 4살입니다."하고 이상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네 살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어리둥절해 하자 그 노인은 "제 나이 올해 84살이오나 지나간 80년은 제게 있어서 살았으나 죽었던 해에 불과 하옵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온 지는 이제 겨우 4년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럼 사람다운 삶은 무엇인가? 바로 떠나야 할 인생임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입니다. 그냥 죽을 것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고, 왜 왔는지 분명히 알고 정신 차리고 무엇에서 떠나야 하는가 어디로 떠나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걸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라반과 그의 아들들의 시기와 모해로 2절 외삼촌 라반이 마음이 변하여 안색이 바뀌고 이를 알아차린 야곱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란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마치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가나안 땅으로 떠났듯이 야곱은 3절 꿈에서 하나님의 떠나라는 음성을 듣고 4절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을 불러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이 16절 하나님 뜻대로 준행하라고 하며 마음을 합하고 20년 만에 드디어 야곱의 고향으로 도망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1. 첫째로 우리는 허무한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서 떠나야 할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하면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엄청난 재물과 식솔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1절에 라반의 아들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2절 라반이 야곱을 대하는 게 달라지게 되어 단순히 무서우니까 떠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재물도 많아지고 정말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지만 야곱은 자기 안에 채울 수 없는 허한 공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의 좋은 것과 갖고 싶은 것 다 가졌다고 해도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장 많이 가져보고 누려보았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 가져봐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만드신 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땅에 주어진 것들로 만족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아무리 장난감이 재밌고 좋아도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안전한 곳은 세상에 없습니다. 엄마 품 떠나 장난감에 빠져 돌아오지 않는 아이 그건 아이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를 지으신 분께로 돌아와야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제가 홀어머니랑 떨어진 지가 벌써 13년째입니다. 가끔은 갑자기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저도 모르게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니까 절 나아준 어머니랑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 집사람도 똑같더라구요. 물론 한국에 어머니와 전화 통화하지만 항상 옆에 있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함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육신의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도 불안한데 하물며 영적인 어머니 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우리 육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지으신 분과 떨어져 있다는 것, 이건 불안한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불안한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에서 떠나 우릴 지으신 분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 전에 나와서 “아버지 나 왔어요!” 너무 피곤해서 때론 졸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때가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탐욕과 분쟁에서 떠나야 할 인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외삼촌 라반은 정말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재물을 불리기 위해 조카 야곱을 20년 동안 마치 종부리듯이 다루며 감언이설로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15절 보십쇼. 두 딸 레아와 라헬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아버지가 탐욕이 많았으면 이렇게 그것도 친 딸들이 하나같이 아버지를 비난했을까? 저희 딸들이 가끔 “아빠 그만먹어 돼지 돼면 어떻게 해?” 그런다고 말씀드렸죠? 정말 우리는 돼지같이 탐욕스럽게 살고 있지 않는가 자꾸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누구나 자리 잡고 있는 탐욕의 본성을 철저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더 더 더 가지려고 하는 끊임없는 욕심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죽하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겠습니까? 이 탐욕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러한 탐욕으로 인해 부전자전이라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다시 1절 보십쇼.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보십쇼.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우리 한국에 돌아가시는 부모님 유산 때문에 형제가 서로 연을 끊고 원수가 되는 이야기, 심지어 칼부림도 나고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 이 라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야곱과 처남 매부지간입니다. 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입니까? 그런데 거기 탐욕이 들어가니까 옆집에 사는 사람만도 못한 원수관계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혼자 왕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형제 70명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비록 배다르지만 이 야곱의 12아들 중 10명의 형들이 나중에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죽이려 하다가 애굽에 팔아넘긴 것 보십쇼. 형제도 분명히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쟁에서 떠나야 합니다. 욕심에서 떠나고 분쟁에서 떠나면서 사는 것, 욕심과 분쟁을 떠나는 인생, 이게 저와 여러분이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욕심과 분쟁을 피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첫 사랑을 떠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짝사랑 했던 첫 사랑이 아니라 처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3절 보십쇼. 야곱이 지금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게 말하고 있는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음성 이게 사실 예사로운 음성이 아닙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지금 이 순간은 야곱이 20년 만에 잃어버렸던 하나님 만난 감격이 되살아나서 설명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세상 재물과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정녕 찾고 사모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제 꿈을 통해서 다시 벧엘에서 가졌던 그 첫사랑과 첫 신앙을 기억하고 흥분에 차서 아내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잃어버렸던 첫 사랑,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두 아내들이 한 마음이 됩니다. 그동안 서로 아들 가지려고 싸우고 시기 질투하고 계산하고 거래하던 여인들 레아와 라헬이 비로소 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16절 끝에 한 목소리로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롬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나누어지고 갈라질 때 하나님과의 첫 사랑, 첫 신앙을 회복하면 다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하나 되는 방법,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최고의 방법은 역시 하나님을 향한 처음 신앙을 회복하는 길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 되니까 17절과 18절 모든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문제없이 떠나게 됩니다.
어제도 다윗은 첫 사랑, 첫 신앙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옛날 목자로 양을 칠 때에 지켜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하나님을 왕이 되어서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올 때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모르게 온 몸으로 하나님의 오심을 찬양했습니다. 체면과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되었는데 제가 자꾸만 저 스스로에게 아쉬운 게 바로 이겁니다. 처음 중학교 때 주님 만났을 때에 그 뜨거움을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가? 처음 전도사님 될 때에 감격, 처음 목사 안수 받을 때에 감격,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주님 앞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하나님 사랑하는 열정이 식어졌다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첫 사랑, 첫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만 봐도 눈물이 나왔던 그 때를 회복해야 합니다. 장로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고 집사님이 되셨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직분이 아닙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중심이 첫사랑 때랑 변함이 없는가? 그 때로 돌아가시길 첫 신앙을 찾아 떠나는 인생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