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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하나를 만드사!

새벽예배 2023.10.19 | 에베소서 2장 11-22절 | 이선기 목사




에베소서 2장 11-2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벽 묵상

무지개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못가에는 조약돌들이 깔려 있고 잡풀들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툭하면 싸우는 개구리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이 샐 때부터 공연히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습니다. "연못에 들어오지 마. 이 물은 내 거야." "이 섬에서 나가 이 땅은 내 거야!" "공중은 내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쳤습니다. 섬은 순식간에 물줄기에 휩싸이게 되었고 빗줄기가 하늘을 메우더니 연못은 흙탕물이 되었습니다. 물이 불어나서 섬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개구리들은 춥고 겁이 나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들은 거세게 출렁이는 시커먼 물 위에, 아직 솟아 있는 몇 개 안되는 미끄러운 바위 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바위들도 곧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못에는 바위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셋이 그렇게 붙어 있으니까 점점 무서움은 덜해지고 함께 희망을 나누게 되자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자 연못의 물이 조금씩 빠지더니 다시 연못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제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 땅에 함께 더불어 살도록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내 주위의 모든 이들과 화목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 1년 반 전에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려 버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이 못된 것들아! 왜 싸우고 난리야?”

안 그러면 좋겠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가 자꾸만 싸우는 곳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하고 변명을 해 봐도 마음 한편이 꺼림직한 것은 왜일까요?

바울이 3년간 머물면서 사역했던 에베소 교회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흠잡을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8절 이후에 보면 에베소인들은 바울의 전도를 접하고 주술적인 책을 모두 불태워버릴 할 정도로 결단력이 있고 상당히 괜찮은 이들이었습니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딱 하나, 에베소 교회 내의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과의 갈등의 문제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들은 유대교적 사고와 기준 아래에서 이방인을 수용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방인이라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할례와 음식 문제를 제기했고 때로는 총회의 결의를 무시한 채 잘못된 가르침을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부딪친 대적자들의 대부분이 바로 유대인 출신의 거짓 교사들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됩니다. 다행인 것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을 통하여 거짓 교사들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결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면서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화합이 힘들지만 반드시 꼭 해야 할 숙제임을 밝히면서 형식적인 율법의 굴레에서 이제는 벗어나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라 완전히 화합하라 하면서 간절히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을 느끼시면서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은

1. 첫 번째로 바울은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하게 되었음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3절 보십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엔 크리스토,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바울의 삶을 대변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13개의 서신 속에 이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이 무려 172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누가 가까이 오거나 혹은 받아들여 줌으로써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화평을 주심으로써 이루어진 화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바울은 이방인들이 과거에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상기시켰습니다. 12절 보십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자이더니” 즉 이방인들은 이전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으니 지역이 어디 출신이건 하나 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몰랐던 때를 자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왜 교회에 가면 처량 맞게 우나? 왜 돈 내고 교회 가서 그 졸린 이야기 듣고 있나? 제 아버지도 예수 믿기 전에는 왜 우리나라에 신도 많은데 하필 서양에서 들어온 신을 믿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참 착하게 살았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고 살았는데 왜 교회는 자꾸 죄인이라고 하나? 그래서 교회 가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면서 인간의 한계,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느끼시고 가족들의 기도로 의사도 놀랄 정도로 마비가 풀리는 것을 경험하시고 나서 완전히 바뀌셨습니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 알겠어. 예수님의 피가 나랑 상관이 없었는데 그 피 때문에 내가 죽음 이후에 영생을 얻게 되었구나. 이제야 알 것 같애. 주님 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고 죽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제 아버지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인생을 바꿔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 저와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고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 되는 관계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화목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13절 끝에 보십쇼.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러분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즉 이루어졌다는 표현은 곧 십자가,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미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증오와 멸시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던 담입니다. 이 담에는 유대인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즉 이방인이 이 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인 드로비모와 성전에서 서원의식을 행하다가 드로비모를 이 담 안쪽으로 데려갔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목을 소망하면서 바로 이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화평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다. 그러니 다 용서받은 죄인되었으니 즉,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를 만드신 것이다 14절 보십쇼.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으로 에베소 교회가 이 문제 때문에 진통을 겪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미 중간에 막힌 담을 이미 허무셨다, 자기 육체로 허시고, 즉 죽으심으로 육체를 다 희생하심으로 막힌 담을 허무셨는데 너희들은 왜 주님의 피로 이미 이루신 것을 다시 왈가왈부 하느냐? 16절 보십쇼. 십자가를 더 강조하면서 표현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신 그리스도이신데 왜 우리는 서로간의 담을 허물지 못하느냐? 한 몸이 왜 나누어져 있느냐? 십자가로 허무셨는데 원수된 것을 소멸하셨는데 왜 또 다시 차별하고 멸시하여 다시 원수를 만들고 세우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 올 때마다 저 십자가를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장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멋있게 치장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투박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오히려 십자가의 의미를 잘 전달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이미 모든 담을 다 허셨는데 왜 나는 아직도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가? 왜 우리사이에 담을 만들고 원수를 만드는가? 십자가를 보면서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내가 막은 담이 생각나시면 가서 화해하고 화목하고 다시 와서 예배드리라 하신 말씀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고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될 때에,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19절 보십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서 이 하나님의 권속, 헬라어로 “오이케이오이 투 쎄우”라고 하는데 이 표현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내 것을 내려놓고 내 고집, 내 텃새, 내 이기심과 특권의식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하나 되게 될 때에 비로소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 여러분 이것보다 감격적인 일이 어디있습니까?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시간의 창조주가 되시는 분이 나와 가족이 된다고 할 때에 그 감격스럽고 뿌듯함. 여러분 이걸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여러분 돈 주고 이걸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특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부터 그걸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사실 잊지 않고 감격 속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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