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하지 말라

새벽예배 2022.08.23 | 창세기 12장 10-20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12장 10-20절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새벽 묵상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다!” 누가 한 말일까요? 미국 대공황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 사람들을 다시 일어나 뛰게 했던 명언 중에 명언입니다. 그의 아내 엘리노어 루즈벨트도 두려움에 대하여 이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두려움과 진정으로 맞서 싸울 때 당신은 힘과 경험과 자신감을 얻는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올까요? 존 플라벨 목사님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엔 관심을 기울이지 말자. 옥한흠 목사님은 두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 하시며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람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웠던 엘리야도 두려움에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 로뎀 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호렙산 동굴 속에서 낙담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숯불에 구운 떡과 물로 어루만지시고, 세미한 소리로 동굴에 있는 엘리야를 찾아 위로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과 낙담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두려움과 낙담이 올 때에, 낙담을 이기는 방법을 기억해야 합니다. 낙담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새로운 용기가 생깁니다. 낙담을 이길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귀를 두 개 주신 이유,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들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더 집중하여 용기와 지혜와 힘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려움과 낙담의 순간을 인간의 잔머리로 이겨내고자 했던 아브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과연 그가 믿음의 대표인가 믿음의 조상 맞나 의심 갈 정도로 약하디 약한, 아브람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잘 아시는 대로 아브람은 흉년으로 인해 급히 식량이 풍부한 애굽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사래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원하는 것은 남의 아내도 마음껏 취한다는 애굽의 왕 바로에 관해, 익히 소문을 듣고 있었던 아브람은 사래와 미리 이야기를 하고 잔머리를 씁니다. 13절 “그대는 나의 누이라” 아내를 누이라 하기로 하고 애굽에 들어갔고, 15절 결국 사래는 왕의 궁으로 들어가고 17절 하나님께서 이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얼마나 재앙이 컸던지 18절 19절에 바로는 세 번이나 “네가 어찌하여” 이 표현을 쓰면서 아브람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이렇게 하게 된, 잔머리를 쓰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걸 거울삼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시고 두려움과 낙담을 당당히 이겨내시기를 담대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첫째로, 아브람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13절 보십쇼.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여러분 이게 남편입니까? 아내들이여 이런 남편이 있으면 당장 헤어져야죠. 이게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절대 권력의 사람 바로를 두려워하는 아브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여호수아가 소리 지를 때 태양과 달을 하늘에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태양이 거꾸로 10도 물러가게 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의 하나인 태양도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울왕이 사무엘 선지자가 오기 전에 그냥 제사장 없이도 대충 제사를 드려버린 것, 블레셋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길 수 있는데 당장 눈앞에 있는 블레셋이 무서웠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아침에 문 밖에 나가보니 거처를 둘러싼 아람 군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했더니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종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게 하옵소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와 게하시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 모두가 두려워하는 6척 장수 골리앗 앞에 갑옷도 거추장스럽다고 벗어 던지고 홀로 나아갔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물맷돌을 몸에 지니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갑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니엘의 세친구 평소보다 뜨거운 풀무불 7배나 뜨거운 불 속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 불속에 타 죽을지라도 우리는 왕의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사 입다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늘 잊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 350장 이런 가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오 우리들이 싸울 것은 육체 아니오 마귀권세 맞서 싸워 깨쳐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싸움 사람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싸움, 하나님 의지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둘째로,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위기가 올 때에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가니까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을 먼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만 좋았지 이 문제를 아뢰지 않고, 이미 큰 보호하심을 경험했는데도, 당장 눈앞에 문제 앞에서 두려워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얄팍한 인간적인 술수로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습니다. 다시 13절 보십쇼. 아내이기도 하지만 당신 내 동생도 맞잖아, 딱 한번 친 오빠 동생인척 하자 그러면 13절 끝에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다 철저히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브람의 우둔함.

어마어마한 성 여리고를 일주일 만에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 그다음 아이성은 하나님의 뜻은 살피지도 않고 그대로 진격합니다. 한 2-3000명만 갔더니 보기 좋게 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요거면 되겠지! 이렇게 하면 될 꺼야 이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너희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고 너희 길은 내 길과 다르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방법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돈으로 안 되는게 어디 있니? 물질 만능주의의 대표적인 말입니다. 권력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니? 이게 세상의 기준입니다. 옛날에 그런 말 유행이었죠? 개그맨들이 자주 썼는데 야! 대한민국에 돈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니? 그런데 그 말은 참 우리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의 기준은 달라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깊이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귀를 기울이고 세상과는 달라도 하나님 방법대로 하는 것, 이게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윗 왕이 잘 한 게 뭐였습니까? 그렇게 남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지었어도, 항상 잘했던 것 전쟁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있습니까? 누구를 찾아가볼까? 누구한테 부탁해볼까?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 다 내려놓으시고 십자가 앞에 철저히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시간 기도하실 때 놀랍고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나의 유익을 얻으려 할 때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인 사래를 희생시켜, 아내의 정조를 미끼로 위기를 면해 보려는 아브람,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했는데, 아브람 이게 신앙의 대장부입니까? 불신앙의 졸장부라고 할 행동입니다. 여러분 이런 남자 믿고 사는 사래가 대단한 여인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아내는 지켜야죠. 길에 가다가 깡패 만나면 여자 친구 여기 있습니다 가지세요 하고 도망가는 남자 있습니까? 그건 남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머리가 터져도 죽을 때까지 싸워야죠. 그런데 여기 이 소심한 남자는 아직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어서 그런지 졸장부, 남자 망신 다 시키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뿐만이 아니라, 사실 우리도 누구나 다 이런 생명의 위협이 올 때에 아브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씀드렸죠? 이렇게 다른 사람 희생시키는 것 다른 사람 핑계 대는 것은 사실 아담 하와 때부터 우리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아담아! 너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와만이라도 살려주십쇼. 그랬으면 아마 아담을 용서하시고 하와를 다른 여인으로 바꾸셨을 텐데... 하와도 그랬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 즉 뱀 만드신 하나님이 문제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하와도 아담은 죄 없습니다. 아담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었을 뿐입니다. 그랬으면 아마 아담보다 더 멋진 남자를 하나 더 만들어서 교체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탓 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 본성 속에 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거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언젠가 차에 카톨릭 교인들이 동그랗게 내 탓이요! 스티커 붙이기 운동을 했습니다.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사람 탓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라는 거죠? 근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이걸 앞에다 안 붙이고 차 뒷 유리에다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니 탓임을 깨달으라는 거죠? 인간의 남의 탓으로 돌리는 본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은 희생시켜도 나만 살겠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 대신하여 나를 철저히 희생시켜, 십자가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무엇이 복음인지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잔머리 굴리며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움과 낙심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셔서 두려움과 낙심을 이겨내는 참 승리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