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동안 살아보니

새벽예배 2022.07.04 | 시편 30편 1-12절 | 이선기 목사



시편 30편 1-12절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새벽 묵상


어느 마을에 예수님을 잘 믿는 유명한 의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모두 그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환자의 얼굴과 걸음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 처방을 하는 명의(名醫)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임종을 앞둔 의사를 찾아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죽음을 앞 둔 그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휼륭한 세 명의 의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로 과식하지 마십시오. 12시 이전에 잠들고 해 뜨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걷다 보면 웬만한 병은 다 나을 수 있습니다." 말을 하던 의사가 힘들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식과 수면과 운동은 다음 세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할 때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 보다 의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육체와 더불어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기도와 사랑'입니다. 육체만 건강한 것은 반쪽건강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고루 건강한 사람! 이 되십시오. 말씀 묵상약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기도약은 부작용이 없는 만병통치약입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는 많이 복용해도 됩니다. 사랑약은 비상 상비약입니다. 이 약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가장 중요한 약입니다." 의사는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다 알려준 후에 평안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스라엘 역사 상 최고의 왕인 다윗도 이 땅의 삶과 작별 인사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다윗은 지나온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온갖 고난과 질곡의 현장에서 구원하셨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나라를 얼마나 강하게 만들었는지 군사가 얼마나 많은지 여러 가지 셀 수 없는 업적들을 이야기하면 한이 없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접어두고 인생 종착역 근처에서 돌아보니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하고 고백하고 싶었던 다윗, 오늘 시편 30편이 바로 그런 다윗의 마음이 담겨진 시요, 다윗의 유언이라고도 불려집니다.

한편 오늘 본문 시편 30편 맨 앞에 보시며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다윗왕 당시에는 아직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솔로몬왕 때 지어지죠. 그런데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는데 시편 30편 도입에 왜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는가? 역사적으로 신구약 중간기, 즉 기원전 166-160년 사이에 마카비 통치 때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이 모독당하고 훼파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바로 직후에 유대인들은 온 민족의 힘을 합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도했었습니다. 그 때에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하기 위해 최고의 왕 다윗의 인생 전체를 기억하자 하면서 이 시편 30편을 묵상하면서 성전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했기에 성전 건축을 소망하며 지어지고 불려진 성전 낙성가인

소망하기는 저와 여러분도 이 시편 30편을 묵상하면서 짧지만 우리 인생 전체를 잠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길 유언도 잠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무너진 성전,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영혼의 무너진 곳이 있다면 다시 세우시고, 우리 삶을 다시 진지하게 세우며 끝이 있음을 알고 준비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시편 30편 다윗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1. 첫째로 사람이 사는 이유, 삶의 목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를 높이는 것,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임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다윗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시편의 처음 절과 마지막 절이 중요하죠. 처음 절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내가 주를 높일 것은, 히브리어로 “애로우밈카”라고 발음하는데, 내가 주님을 최대한 높이고 높이는 것은, 즉 인간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함이다 하고 철저하게 밝히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도 보십쇼.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여기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뭐가 생각나십니까?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테힐림)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찬송을 불러 올려드리게 하려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노래 “나의 찬송”즉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찬송, 하나님만을 높이는 찬송”을 부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우리가 무엇을 꼭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유언의 처음과 끝이요. 저와 여러분의 유언의 처음과 끝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강제적으로 높여라 찬양해라가 아닙니다. 다시 1절 보십쇼. 중간 “나를 끌어내사”이 표현은 저 사람 끌어내! 그럴 때 나쁘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나를 끌어내사”는 히브리어로 “딜리타니”라는 단어로 마치 물을 긷듯이 그 부분만 싹 들어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거의 힘이 다 빠졌을 때 싹 들어올려 살려내는 것, 그게 딜리타니의 의미입니다. 시편 10편 9절에 보면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다윗의 대적들이 그동안 얼마나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고 다윗의 생명을 위협했는지 아주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갑작스럽게 싹 건져내셨다.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살려내셨다.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제 여동생이 초등학교 때 저랑 놀다가 저는 동생이 없어진지도 모르고 집에 왔고 동생 어디다 두고 왔냐? 어머니가 혼내는 데도 몰라 없네! 했다가 엄청 혼나고 제가 온 길을 되돌려 가보니 동생이 큰 길 하수구 매몰에 빠졌고 거기서 신발 떠내려 간다고 울고 있는 동생, 어머니가 동생을 그 매물에서 확 들어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가인같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는 무책임했던 모습, 어머니는 저를 혼내셨고, 가서 구덩이에 빠진 동생을 건져내셨던 모습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인간의 상태, 심각한 운명, 그리고 구원의 모든 모습들을 이렇게 우리 삶 가운데 가끔씩 보여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원래 가능성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멋대로 살았던 존재,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운명에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저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죽게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사실, 건져내신 하나님, 구원하신 하나님,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것을 안다면, 생명의 은인되신 분을 기억하여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아무리 오래 아무리 목이 터져라 찬양해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는 사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새벽에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만을 높입니다. 높임을 받으소서.” 많이 외치시면서 기도하시고 기도하시다 막히면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찬송 받으시기 합당하십니다. 찬양 받으소서. 찬송 받으소서. 우리 삶의 목적이 분명해 지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부모님이심을 잊지 말라. 그동안 살아보니 이걸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하나님은 나의 부모 되신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0편만의 특별한 표현이 두 군데 있는데 5절과 11절입니다. 여기서 5절이 바로 이 하나님의 부모 되심의 특징을 여실히 담고 있습니다. 5절 보십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 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왜 노여움을 거론하는가? 부모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분명히 노하는 분, 분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되건 말건 신경 안 쓰는 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새 아버지나 새어머니는 혹시 그럴지 몰라고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그냥 둘 수 없는 부모의 마음, 노여움으로 혹은 매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돌아설 때에 결국에는 매 맞은 상처는 어루만져 주시고 때린 것에 비교할 수 없이 너무 큰 사랑으로 보다듬어 주시는 분 그런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할 때에 그리고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고 그 죄를 덮고자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였다가 결국 뜻대로 숨겨지지 않자 우리아를 일부러 죽음으로 내모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나서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죄를 정확히 꼬집는 나단의 직언을 경험하게 될 때에 부모 되시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깨닫게 됩니다. 밧세바와 동침하여 생긴 아들이 죽어갈 때에, 즉 하나님이 죄로 인해 생긴 아들을 죽이실 때에 시편 51편을 써서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게 되었고 비로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부모 되심을 경험했습니다. 즉 죄로 인해 얻은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 그의 노염은 잠깐이지만 다윗을 용서하시고 그토록 잔인한 죄를 저지른 사람 같지도 않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너무 큰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 다시 존귀하게 세우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결국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곧 오게 될 아침에는 기쁨으로 다 회복시키는 하나님,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여러분 두 달 전인가요 어머니의 날이 있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아버지의 날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머니께 아버지께 어떻게 마음을 표현하셨습니까?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맞을 때마다 육신의 부모님을 생각하고 섬기고 공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통하여 영혼의 부모 되시는 사랑이 한없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은 감동주시는 반전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보니 하나님은 찐한 감동의 하나님이시더라 표현합니다. 11절 보십쇼. 유명한 구절이죠.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여러분 이 구절은 사실 그냥 읽어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극 반전의 표현이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슬픔과 고통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심, 춘향전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지막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바로 자신을 밝히지 않고 반전의 감동과 기쁨을 주고자 물어봅니다. 내 수청도 거절하겠느냐? 춘향은 남자는 그 놈이 그놈이구나. 괴로움이 극에 달하여 대답합니다. 저는 제 마음속 한 사람 그 분 외에는 누구도..하면서 웃고 있는 이몽룡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반전의 기쁨, 감동했던 춘향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굽이굽이 겪었던 하나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극 반전의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 저와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있어 기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극 반전의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망하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다시 그런 극반전의 감동들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최고의 감동은 바로 십자가의 감동입니다. 바라만 바도 너무 큰 사랑이었기에 대신 죽어 줄 정도의 너무 큰 사랑이었기에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은혜와 감동의 감사.. 저와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감동이 회복되시고 계속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