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3.07.04 | 사도행전 7장 17-50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7장 17-5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새벽 묵상
천 년 전에 영국에 카뉴트(King Canute, 1016-1035)라는 한 괴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하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번은 이 왕이 신하들에게 ‘왕좌를 해변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바닷가에 놓인 왕좌에 앉아 수평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밀물이 밀려오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파도여, 멈추어라"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번 명령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었고 왕이 앉은 자리의 절반까지 물이 차 오르더니 급기야 왕은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모두 똑똑히 보았느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찮은 것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서는 이날 이후 왕은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상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귀하게 여기는 것들, 눈에 보이는 왕관 왕좌 같은 것들 잠깐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집착하며 너무 욕심내며 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주인공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제 우리는 사도행전 7장을 시작하면서 스데반 집사가 여러 유대인들 그야말로 성경 전문가들 앞에서 그들이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에 집착하고 율법에 치우쳐 있어 그 본질을 놓친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여러분 부형들이여 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말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첫 번째 설교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50절까지 스데반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인데
우선 17절과 18절 보십쇼. 어제 말씀드린 아브라함과 요셉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왜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고 했죠?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의도였습니다. 메소보다미아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만나셔서 약속하셨던 하나님.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래서 어디로 가게 하셨는가? 하란으로 갔다. 그런데 하란에서 또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갔다는 것. 머물러 있지 않고 이끄시는 대로 믿고 움직였다는 것, 즉 하나님은 당신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순종하여 가는 것, 어디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이끄심을 따라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참 성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동행이 성전의 본질이다. 이게 스데반의 집사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다음으로 요셉은 왜 언급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자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셨다. 하나님의 건지심, 구원하심, 성전의 본질은 바로 건져내심, 구원하심이다. 기억나시죠?
이제 19절부터는 모세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누구입니까? 바로 모든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율법의 원조였습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님은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율법 613가지의 그 지키기 어려운 지금의 율법들의 원조인 모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율법의 본질을 찾으십시오. 율법이 참 율법 되게 하십시오. 하는 그런 의도로, 지금 듣는 이들이 다 아는 것 같지만 잊어버린 모세의 참 모습을 되찾아 주고자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몇 십 년을 들어왔고 너무 익숙하여 다 아는 것 같은 성경의 인물이나 이야기가 어느 날 다시 그동안 깨달을 수 없었던 새롭고 더 큰 은혜의 메시지로 들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공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파면 팔수록 더 깊은 것, 생각하지 못했던 또 새로운 은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주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 본문 스데반이 설교한 모세의 이야기 중에서 특별한 것은 무엇인가?
1. 첫 번째 스데반이 모세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20절 보십시오.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왕이 유대인들을 줄이고자 어린아이들을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모세가 태어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는 헬라어로 “아스테이오스 토 데오”라고 발음하는데 이 단어는 철저히 하나님이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지금 생명의 위협 속에서 모든 사람은 모세를 보고 “아이고 하필 지금 왜 태어났니? 차라리 여자 아이로 태어나면 살 수나 있지, 왜 남자 아이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지지리도 복도 없는 아이구나” 하고 혀를 찰 수 밖에 없는 시기에 태어났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탄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구니에 담겨져서 나일강에 띄울 수 밖에 없었던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를 운명이었던 모세의 위태로운 삶, 그런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를 아름답게 보셨고, 그를 통한 큰 계획, 결국 이스라엘 200만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사실, 여러분 이 드라마틱한 모세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도 다 각각 드라마틱하게 펼쳐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금수저를 잡고 태어났다고 끝까지 금수저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흙수저를 잡고 태어났어도 끝까지 흙수저가 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한대로 예상한 대로 살아오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면서 내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기대하시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람 바라보면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실망과 배신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하나님이 보시기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스데반의 설교 중에서 아브라함 요셉 모세 중에서 가장 긴(중요하니까 길겠죠?) 이 모세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50절까지 계속 보십시오. 스데반은 철저히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절 17절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로 시작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내 백성, 내가 너를, 전부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눈에 집중하시고 특별한 인생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두 번째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는 표현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도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지어 보았는데 37절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즉 모세, 율법의 대표인 이 모세가 후에 오시게 될 메시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옛날에 미리 예언하고 예표했다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라. 그 분이 율법의 완성이시고, 율법 자체이시다 하는 표현입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그 뜻을 조금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한 설교에 정말 정확히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지금 스데반 집사가 모세, 즉 율법의 대표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모세가 예언한 모세 같은, 아니 실제의 주인공인 예언자가 정말 이 땅에 올 것인데 정말 왔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왜 그걸 깨닫지 못하는가? 참 성전이시며 참 율법이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결국 모든 귀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의 당당한 복음 전파, 부드럽고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복음, 우리가 꼭 전해야 복음의 중심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친교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속회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이 하는 설교의 중심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설교의 결론을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복음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뒤에 44절부터는 더 확실하게 지금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피부에 와 닿도록 좀 더 확실한 시청각 재료를 떠올리게 하며, 3. 성전과 율법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우상화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성막”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44절 보십시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에 하신 것이라” 즉 광야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여 만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만든 성막, 하나님의 장막을 기억하라. 46절에 다윗이 하나님께 은혜 받아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해 달라고 하더니 47절 솔로몬 때가 되어서야 지었다. 48절 그러나(이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즉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곳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49절 하늘이 나의 보좌요 땅이 나의 발등상이니 내게 무슨 집이 필요하고 안식처가 필요하겠느냐? 즉 당신들이 지금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눈에 보이는 성전, 하나님은 거기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분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다. 50절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인데 우리가 뭐라고 우리의 손으로 뭘 만들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지었다고 하느냐?
마지막까지 반복하며 철저하게 유대인들이 그렇게 집착하는 눈으로 보이는 성전,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들, 그것들의 본질을 깨달으라 하고 껍데기 붙들고 거기에 치우치지 말라! 교훈하는 스데반 집사의 당당하고 정확하고 치밀한 교훈과 복음전파, 저와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당당하시고 강력하게 복음의 진리 앞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도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에 순교하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신 말이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말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이 가장 예수님을 닮은 인물이었다 하고 평가되지만 사실 스데반 집사님이 당당하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신 모습이 바로 가장 우리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 닮으시길 바랍니다. 일거수일투족, 우리의 모든 입술 손과 발이 다 예수님 닮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주님을 닮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