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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별 새벽예배

새벽예배 2023.04.03 | 마태복음 26장 6-16절 | 이선기 목사




마태복음 26장 6-16절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새벽 묵상

한 농부가 염소와 나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르는 나귀를 매우 아꼈습니다. 염소는 주인의 이런 태도가 못마땅했고 시기와 질투를 느껴 나귀를 쫓아낼 계략을 꾸몄습니다. "나귀야, 너처럼 불쌍한 동물도 없을 거야. 나는 이렇게 편하고 여유롭게 지내는데 주인은 어쩜 너한테만 힘든 일을 시키니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니? 내가 너를 위해서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게" 염소는 나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습니다.

"짐을 싣고 개울을 건널 때 자꾸 넘어지렴. 그러면 주인은 네 몸이 쇠약한 줄 알고 다시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 "

나귀는 염소가 충고한 대로 개울을 건널 때 일부러 계속 넘어졌습니다. 주인은 평소 건강하던 나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가축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가축 의사는 "나귀의 기력이 약해졌으니 염소의 간을 먹이면 금방 낫습니다"하고 일러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인은 즉시 염소를 잡아 나귀를 치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P. 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질투의 임상학’을 저술한 화이트(G. White) 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바로 이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예를 든 바 있습니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범죄행위의 암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투의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는데 우선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는다, 같은 분야에서 나랑 아는 사람과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 질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러분 동창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랑 관계있는 어릴 때 같이 지낸 친구가 부자가 된 것을 보면 십중팔구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질투의 불길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 불꽃이 사나워진다고 합니다.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이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불길에 화상을 입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질투 때문에 자기랑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도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첫 새벽인데 오늘 본문에는 질투함으로 자신을 망가뜨렸고 뒤에는 결국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가롯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가 바로 가롯유다가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에 주님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앞에 6절에 보시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주님께 부어드린 일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하루 전 날인 안식일 즉 토요일에 있었던 사건인데, 그다음 붙어있는 14절부터 16절까지 가롯유다가 변심한 것은 3일 뒤인 화요일에 있었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깝게 이어지게 했을까요?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두 가지 일을 비록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가롯 유다 이야기를 향유 옥합 부은 여인의 이야기 바로 뒤에 배치함으로 그 극적 효과를 더 극대화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롯유다가 왜 갑자기 변심했겠는가? 그의 질투심 때문이었음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이렇게 배열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질투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늘 깨어있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도 누구나 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넘어지는 자 되지 마시고 눈을 감는 시간이 많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눈 감고 많이 주무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눈 감고 주님께 집중하는 기도의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시기를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한 것처럼 세상의 것에 대한 시선을 돌이키시고 주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 본문 앞부분, 마태의 의도대로 과연 가롯유다가 그렇게 질투했던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 이 여인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1. 첫째로 저와 여러분의 주를 향한 마음이 전부인가? 아니면 일부인가?를 묵상하시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향유 옥합을 부은 이 여인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고 그저 7절에 “한 여자”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라는 가사 때문에 봐라 막달라 마리아 맞지 않느냐? 하시는 분이 있는데 여러분 향유 부은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총 세 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세 번의 사건을 한 여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2장 3절에 보면 이 여인은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여인은 나사로 누이동생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왜 마리아라고 정확하게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여자라고 했는가는 당시에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한 시대였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이 여인이 과연 누구였느냐 밝히는 것 보다는 이 여인이 분명히 주님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기에 이렇게 귀한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많이 들으셨겠지만 7절 보시면 이 향유옥합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근거로 보면 그 가치가 약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 300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1년 생활비의 가치였습니다. 달러로 하면 얼마나 될까요? 한 4만 불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가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싼 향유를 깨뜨렸다는 것은 주님께 받은 은혜의 가치가 그 이상이었기 때문임을 뜻합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 여러분 장기 이식한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장기를 값으로 매길 수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나흘이나 지났는데도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려내 주신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가장 큰 가치였다는 것입니다. 장기 이식 그 이상의 고마움, 감사, 내가 가진 것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감사 이상의 감사,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사의 마음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죽은 오빠를 살려낸 것도 감사한데 죽을 운명인 나, 오빠가 아닌 바로 나를 살려내신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번 한 주간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지심의 이유는 그냥 위인 중에 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내 대신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으신 예수님.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받은 은혜, 대신 죽어주신 목숨 값을 위해 소유의 전부를 드려야 맞습니까? 일부를 드려야 맞습니까?

인디안 부락에서 선교하는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안 추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추장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선교사님,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 사슴 가죽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선교사는 이 말을 듣고 조용히 대답해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슴 가죽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인디안 추장은 이 말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가더니 얼마 후에 한 마리의 백마를 가지고 와서 또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선교사님, 이것은 이 부락에서 나와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타고 다니는 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선교사는 이번에도 그 말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추장은 뼈로 만든 머리장식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추장의 상징입니다. 나 추장의 권위와 명예까지도 다 주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것마저 거절당하자 추장은 심히 낙심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바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다 바쳤습니다. 이제 제 생명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추장의 이 고백을 듣고 선교사는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그 생명을 원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펼쳐서 인디안 추장에게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전부를 내어주신 주님께 일부가 아니라 나도 전부를 내어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향유 옥합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린 여인의 모습에 8절 제자들이 분개하고 9절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할 때에 주님이 뭐라고 답하십니까?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우선 10절 맨 뒤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제자들은 실리성을 따지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고 저마다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예수님은 그 여인이 왜 그렇게 전부를 드렸는지 그 마음을 알기에 말씀하십니다.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기준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아시는 주님이 기준되시길 바랍니다. 진짜 감사한 것은 두 번째 주님의 해석입니다. 12절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의 사건은 딱 한번이요 온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적인 가장 고귀한 사건이기에 이 여인의 귀한 향유부음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말씀에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은 오빠 살려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린 것인데 주님은 그 의미를 넘어서서 온 인류를 구원하심을 준비하는 사건으로 그 의미를 더 확대하고 계십니다. 13절에는 이 행동이 온 천하에 계속 전해질 것이다 하고 미래의 축복으로 더 크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난 그저 향유 부어드렸을 뿐인데 주님은 그 향유부음의 의미를 주님의 장례와 심지어 온 천하에 이 일이 전파되리라고 시간을 초월한 의미의 사건으로 확대시켜주시는 은혜, 마치 오병이어의 도시락을 드렸을 뿐인데 5000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내가 한 행동에 의미를 부어주시고 더 엄청난 은혜의 사건으로 인정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 이상의 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 저와 여러분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저와 여러분이 주님 위해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해 주시고 역사에 길이 남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산에 바위에 이름 새기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산 정상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산에 가면 한국어로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왔다간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 바위에 새겨질 이름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할렐루야 모세처럼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감격을 가지고 하루하루 기대하시며 힘 있게 준비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가롯유다는 질투심으로 돈 계산하다가 결국 돈 따라가다가 부끄러운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8절 보시면 제자들이 보고 분개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저는요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 말은 분명히 가롯유다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절에도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이것도 분명히 가롯유다가 했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회계역할을 하며 이렇게 돈 돈 돈 하던 가롯유다, 그는 15절 결국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기, 질투, 반감, 자존심 온갖 마음에 분노로 가득찬 가롯유다의 모습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곧 대신 십자가 지실 주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주 부끄럽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부끄러운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는 것,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얼굴을 거울을 보시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이 가롯유다의 얼굴이 아닌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있는 소유들 때문에 계산하고 판단하고 질투하고 비난하고 자존심 상해하고 괴로워하는 가롯유다의 모습이 있다면 이 고난주간에 다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얼굴이 향유 부은 여인의 감사의 얼굴이 되시고 나아가 십자가 지실 주님의 얼굴로 바뀌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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