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갈등에서 감사까지

새벽예배 2022.03.09 | 로마서 7장 7-25절 | 이선기 목사



로마서 7장 7-25절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절.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절.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3월 8일 새벽 묵상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돈 많은 사람 되고 싶으십니까? 예쁜 사람 되고 싶으십니까? 저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밖에 없는 그런 성숙한 사랑의 사람,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그런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만 살아도 너무나 짧은 인생입니다.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성숙한 사랑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냥 사랑해야지 사랑하자 그렇게 결단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자존심 때문에 사랑이 잘 안됩니다. 속에서 뭐가 올라와서 도저히 역겨운 저 인간, 미워 꼴도 보기 싫은 인간, 사랑은커녕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데 하나님 어쩝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사람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나의 약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의 고귀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한 것을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고백하시고 이 사순절에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런 약함과 갈등의 고백이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이고 견고한 믿음의 한 과정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께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요새 믿음 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아멘이십니까?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렇게도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계십니까? 대답이 영~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묻겠습니다. 여러분 전혀 낙심하지 않으십니까? 대답이 더 작아지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가? 전혀 낙심하지 않는가?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쇼. 성경에 나오는 엄청난 믿음의 거장들도 생각보다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낙심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들까지 아낌없이 바치고자 했던 믿음의 대표. 그런데 그의 전적을 살펴보면 약한 모습 투성이였습니다. 아내 사라로 인해 자기 생명이 위태할까봐 흔들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주신다고 했는데 기다리다 너무 힘들었는지 사라가 시킨 대로 하갈을 첩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다가 결국 이삭과 문제가 일어나니까 사라가 시키는 대로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 불말과 불병거 타고 죽지도 않고 산채로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 사실은 엄청 흔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언제 흔들렸는가?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웠을 때 850대 1로 싸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에 흥건한 물도 다 싹 태우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를 다 죽이고 난 다음 최고의 승리를 거두고 난 그 직후, 믿음이 최고였을 때 그 때 흔들렸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하니까 저 같으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이세벨을 치러 갔을 텐데, 엘리야는 갑자기 힘이 빠지면서 얼마나 흔들렸던지, 로뎀나무 아래 숨어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 “하나님 지금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제가 하나님이면 너 엘리야 맞냐? 내가 불을 내리고 제단을 태운 것 다 잊어버렸냐? 하고 확 불로 머리라도 태워 정신차리게 했을텐데, 하나님은 제 생각과 달리 천사를 보내사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먹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참 많이 흔들렸고 낙심했고 약하디 약한 사람들이었다 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항상 굳건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거나 낙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나무에 중간에 마디가 있어 대나무가 튼튼하게 곧게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중간에 흔들리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순간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런 과정을 통해 마디를 만들고, 즉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더 튼튼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 그러므로 그런 흔들림을 겪으면서 오히려 우리는 아! 하나님이 나를 더 강력한 그리스도인으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구나! 가만히 평안하기만 하면 나태해 질까봐 엉뚱한 짓 할까봐 가끔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시는구나 하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더욱 더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동안 오늘 본문 앞에 로마서 4장 5장 6장을 거치면서 아주 강력하고 힘 있는 복음증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7장에 들어서면서는 완전히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중에 14절부터는 완전히 주눅이 든 자세로 갈등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15절 보십쇼.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8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도 같은 표현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게 뭡니까? 난 사실은 아주 약한 사람이라는 솔직담백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의 상황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22절 23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마치 인간의 선과 악의 감각의 내면적 모순에 관한 소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 소설이 오히려 바울의 이 로마서 7장 23절을 따라한 것 같은데 어쨌든, 바울은 내 속에 두 개의 내 모습, 두 가지 법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자꾸만 죄의 법이 자신을 이기려고 한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모순의 상황, 아이러니하고 솔직한 내 안의 고백을 정리하여 드러낸 표현이 바로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솔직한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면서 과연 우리가 인정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1. 첫째로 믿는 자는 갈등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갈등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를 생각해 보십쇼.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 갈등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생 뭐 있어? 그냥 대충 살다가 어쩌다 갑자기 가는 거지! 안 좋은 일 생기면 참 내 팔자도 더럽지! 팔자가 기구하구나! 운명이구나 업보구나 재수가 없구나! 이게 믿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믿는 자의 모습은 다릅니다. 주일날 안 믿는 자는 놀러가도 거리낌이 없는데 믿음의 사람은 왠지 꺼림직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에 죽음 이후의 삶을 알고 마지막 심판을 알게 되었기에, 내 대신 십자가 지시고 죽으심으로 날 구원하신 분, 삼일 만에 부활하신 나의 구원자, 내 삶의 이유 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기에, 주일이 노는 날이 아니라 주의 날, 주일임을 알게 되었기에 주의 전에 오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꺼림찍한 것 그게 정상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애굽의 둘째 치리자가 되기 이전에 누구보다도 이런 갈등을 잘 겪은 사람입니다. 구덩이 속에서 형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순간이 갈등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에서 누명쓰고 감옥 갈 때도 갈등이었습니다. 감옥에서 했던 약속을 술관원장이 잊어버린 것도 또 갈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갈등이 잠잠히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이었다는 사실, 하박국도 갈등을 겪었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잘 믿는 자들은 찢어지게 못 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높은 성루에 올라가서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런 불합리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갈등 이후에 더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더 크고 고상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얼마간 균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냉면 좋아하시죠? 사실 모든 냉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대장균이 우굴거립니다. 밥, 김치에도 균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몸속에 저항력이 나쁜 세균과 끊임없이 결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설사도 하게 됩니다.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투병”은 내 생명이 붙어있는 한 매일 순간 순간 우리 몸에서 계속된다는 사실, 이 투병에서 지는 것을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이 정상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등 속에서 성장한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등으로 더 견고해 지시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두 번째로 시간과 신앙고백은 반비례한다는 사실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장 강하게 보이려고 해야 할 텐데, 오히려 자신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 서신 중 초기에 기록한 고린도전서에는 15장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중기에는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시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 표현합니다. 한편 후기인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는 아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백했습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고 깊어질수록 고백은 더 낮아지고 자신을 더 못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가 숙여진다는 한국말처럼 우리 신앙은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얼마나 큰 죄인임을 더 크게 깨닫는 것 그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고백이 바로 그런 마음에서 나온 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은 저희 어머님께서 출석하셨던 안산에 반월중앙교회 원로이신 박종배 목사님이십니다. 어머님 집이 광명이셨는데 안산까지 버스로 40분은 가야 하셨는데 힘드신데도 꼭 가셨습니다. 그 목사님 볼 때마다 그 분의 깊은 겸손함을 참 자주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목사님 가끔 만날 때마다 나도 저 목사님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놀란 것이 저희 어머님이 여러 번 말씀하시는 내용, 교인 1000명이 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데 큰 딸이 결혼식을 하는데 목사님이 안산에 사는 가난한 성도님들 부담될까봐 결혼식을 숨기셨다는 사실입니다. 토요일에 결혼식인데 하루 전날 그 교회 은퇴 장로님이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금요저녁 심야 기도회할 때 기도회 끝에 주기도문을 막 하고 예배를 끝내려고 할 때에 은퇴 장로님이 앞으로 급히 나가서 담임목사님을 밀쳐내고 마이크 잡고 한 마디 하셨답니다. 내일 담임목사님 딸 결혼하는데 다들 아시냐고? 목사님이 성도들 부담될까봐 숨기셨다고..성도님들도 감동해서 울고, 담임목사님도 우셨답니다. 제 어머님께서 이 말씀 저한테 하실 때마다 아들! 너도 할 수 있겠냐? 그럼 저는 똑같이 대답합니다. 저는 절대 못합니다. 아마 제 딸 결혼하면 동네방네 심지어 덜 친한 사람한테도 막 연락할 것 같은데...신앙의 연륜이 오래 될수록 더 겸손해지는 것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정도를 나타낸다는 사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높으신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시고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 기억하시면서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 낮아지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섬김의 사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갈등하는 우리의 삶을 감사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한창 갈등을 고백하다가 25절에 보니까 바울은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표현은 아주 극반전의 표현입니다. 24절에 곤고한 사람, 나의 부족함, 내 안에 갈등을 보면서 나의 연약함과 자격 없음을 한없이 느꼈던 사도 바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원받고도 죄성이 남아 있어서 쓴 뿌리가 남아 있어서 넘어지기 쉬운 날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함을 고백하게 된다는 가장 반전이 있고 감동적인 고백, 오직 갈등을 해결하는 열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주님의 죽으심으로, 주님의 중보하심으로 이렇게 오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가장 감동적인 바울의 고백, 저와 여러분도 이런 고백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주 평안하게만 신앙 생활하는 것, 그저 교회 주일날 빠지지 않고 헌금 생활 이만하면 됐고, 이만 하면 그냥 괜찮게 신앙생활하는 것, 아무 갈등이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갈등을 겪더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 하나님께 따지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통곡도 하더라도 결국 갈등과 고난 후에 결국 감사에 이르게 되는 것, 돌아보니 이렇게 나를 갈등에서 감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 로마서 7장 바울의 모습이요, 건강한 신앙생활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 고귀한 갈등에서 감사까지의 모습이 있으시길 그래서 더 성숙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